본문 바로가기
Daily Life/기타공부

근대 100년, 한국 영화의 시작

by 아리씨 2022. 3. 12.
반응형

근대 100년, 서양에서 신문물이 도입되던 시기로 우리나라에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안겨주던 시기다.

영화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한국 영화의 시작

 

한국에서 영화가 최초로 상영된 시기는 몇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 안종화의 이론으로 《한국영화 측면비사》에서 "1905년(고종 42) 활동사진이란 이름으로 영미연초회사 선전용으로 상영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둘째, 43년 조선영화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조선 영화 30년사》에서는 최초 상영시기를 1903년으로 잡고있으며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동대문내 전기회사가 기계창에서 시술하는 활동사진은

"일요 및 우천을 제외하고는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실행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도시, 각종 극장의 절승한 광경이 구비하외다. 허입료금 동화 10전"

이라는 광고는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셋째,《조광》 38년 4월호에 실린 활동사진 변사좌담회 대담에서 <처음 들어온 것은 한 삼십칠판년 될걸요>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한국 최초 영화상영은 《황성신문》에 영화상영 광고가 난 1903년 6월보다 좀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상영된 시기보다 다소 앞서 왕실이나 외교관계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보인다.

 

이때에 상영된 영화들은 신문물들의 수입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는 한편도 없었으며 전부 외화로 보여진다. 여러 영화관들이 문을 열면서 무성영화들을 수입해서 상영하였는데 무성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영화가 상영되기에 앞서 해설자인 변사가 나와서 해설을 하였는데 이들의 입담으로 영화가 흥행에 성공되기도 하였다.

1930년 경부터 외국영화가 공개되었으나 필름이 사용된 첫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년 신극좌 김도산일행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 와 그 때 함께 공개된 실사영화 경성전시의 경 이었다. 이것은 모두 한국영화의 효시로 인정되고 있다.

 

 영화관의 모습

 

1900년대에는 관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야외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에 관객은 땅바닥에 앉거나 목재더미에 올라앉아 관람했다. 지금 40대이후의 분들이라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장터에 가끔 열리던 천막 극장안에서 자리깔고 앉아서 영화 구경을 해본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인 프랑스인들이 극장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연흥사, 단성사 등의 극장이 만들어졌다.

또한 옛날 영화라고 하면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변사이다. 지금은 없는 직업이지만 옛날에는 중요하였다. 당시 소개되는 영화들은 외국영화였고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관객들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면의 해설이 필요하였다. 변사는 그같은 역할을 맡아 영화와 관객의 감정교감을 위한 다리역할을 하였다.

변사는 미국등지에서도 등장하였지만 경비문제로 곧 없어졌다. 일본에서는 일본전통극에서의 해설자와 같은 형식의 변사가 등장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일본영화에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기록상 최초의 변사가 등장한 것은 1907년이다. 궁중에서 고종 등 왕실 사람들에게 영화를 상영할 때 원희정이라는 왕실 소속 전무과의 기사가 영화내용을 설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체로 이 시기에 단순한 영화해설 정도의 수준의 변사가 등장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변사는 유성영화가 생겨나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영화관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소위 말하는 종합문화센터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요즘에는 CGV같은 영화관들이 생겨나면서 영화관이 백화점이나 쇼핑몰 위층에 위치하고 먹거리들도 풍부하여 1석2,3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영화관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이익이 생겨나도록 한 것이다. 시내 중심가 등 누구나 쉽게 찾아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 영화의 발전

 

무성영화의 걸음마를 떼던 우리 영화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은 미국의 발성영화이다. 무성영화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변사들의 구성진 목소리에 웃고 울던 관객들은 희한한 소리를 내는 발성영화에 탄성을 자아내었다. 여기에 큰 감동을 받은 촬영기사 이필우와 발성시스템을 만들어 낸 이창근은 함께 한국 발성영화시대를 앞당기게 하였다.

발성영화가 처음으로 개봉된 것은 1926년 미국대통령 연설 실황, 바이올린 독주 등 단편기록영화를 묶은 파트 토끼이다.

한국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은 한국영화의 탄생 17년만에 이루어진 피땀나는 땀의 결실이다. 서양의 토키영화에 비해 기술이 뒤떨어지긴 하지만 우리영화계에 엄청난 충격과 개혁을 일으켰다.

 기 타

연인과 함께 데이트 장소로 극장을 꼽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풍조일것이다. 영화 <친구>에서처럼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러 가는 것 또한 변하지 않은 모습인거 같다. 나도 학교에 다니면서 반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 변하지 않은 것은 영화를 보면서 팝콘이든 오징어든 음료수를 먹는 것이 아닐까한다. 옛날에는 극장안을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팔았지만 지금은 영화보러 들어가기 전에 매점에서 팝콘이나 음료수를 구입한다는 것이 변한 것이라고 하겠다.

 

◎ 결 론

 

영화가 도입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수준은 더욱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대부분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있고 사회현상을 비판하기도 하며 사회문제를 고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영화에 박수를 보내며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영화는 사람이 그냥 지나갔던 문제들을 재조명 하기도 하며 사람들이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도록 만들기도 한다. 지금은 옛날 영화가 도입되던 시기에 비해 한국영화가 많이 발전하였다.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대부분의 영화도 한국영화가 많아졌으며 옛날보다 많은 기술이 발전하였다.

반응형

'Daily Life > 기타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지주의 이론 2.  (0) 2022.03.12
인지주의 이론 1.  (0) 2022.03.12
국제경영학 예상문제  (0) 2022.03.12
지방행정의 지도이념  (0) 2022.03.12
행정관리론(행정행태론, 논리실증주의)  (0) 2022.03.12

댓글